잘난천악 바비-루카스 애프터 역극 기반
250219~ / 발렌타인데이 기념 유혈 빙고판
<Keeping Braveness Longingly (1)> 과 이어집니다.
유혈 및 상해 묘사 있음
케이로스에 대한 자체적 해석 있음
꿈을 꾸었다.
그 몽환적인 비현실의 공간에는 꽃망울이 하나 있었다. 순수하게 반짝이던 하얀 꽃망울, 도화지처럼 하얘서 그리는 대로 변해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운 꽃망울. 아직 제 색을 찾지 못한 그 꽃망울이 분홍빛이 되던 날이 있었다. 그날의 꿈을 꾸었다.
주신의 충직한 수하 중 지옥의 악마를 담당하게 된 존재는 그 흰빛을 끌어안아 주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한 흰색 도화지에 색이 배어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색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흰색이 직접 골라낸 것이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채워 낸 탁한 색깔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때의 하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듯, 흰색이 많이 섞인 것 같은 솜사탕 꽃분홍색. 이윽고 저의 순수한 흰빛에 붉은색을 섞어 낸 악마가 그렇게 태어났다.
그때의 자신이 어땠는지, 바비는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약 사천 년이다. 사천 년을 살아온 바비의 주마등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장면들이 기록되었으며, 소중한 그 존재와의 기억도 족히 몇천 년은 지난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바비는, 한 번쯤은 자신도 그렇게 어떤 색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몸이 괴롭다고, 아프다고 하면. 넌 어떤 반응을 보일 거냐?"
그 한 마디는, 언젠가의 먼 기억을 되살려 내기에 충분했다. 응,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밝은 분홍빛의 머리카락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아기자기한 머리핀들이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며 흔들렸다. 어느새 눈앞에는 도화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제 머리카락을 장식한 머리핀처럼 다양한 색깔로, 얼마든지 채워낼 수 있는 도화지였다.
"루카스."
눈앞에 서서 천천히 입을 여는 그 어린 악마가 꼭 사과 같다고, 바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붉은색이다. 가을의 무르익은 햇살을 받아낸다면 아마 탐스러운 빨간색으로 빛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껍질의 이야기이다. 얇고 부드러운 껍질 한 겹을 벗겨 내면, 그 속은 하얗다. 아주 연한 색이 겨우내 빨간 껍질 안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사과는 빨갛다고 생각하는 자는, 사과의 속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사과의 과육은 무르지 않다. 연한 껍질 속에 숨겨진 그 과육은 제법 단단하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내던지면 내던지는 대로 흠집이 날지언정 어지간한 악력만으로는 부서지기 쉽지 않다.
루카스 로웰도 딱 그러한 아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바비의 머릿속을 스쳤다. 불타오르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과 선명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 늘 고수하는 듯한 자유로운 검은색의 옷, 거기에 늘 꺼내고 다니는 짙은 와인 빛깔의 뿔과 꼬리, 날개. 전체적으로 옅고 가벼운 색을 내비치는 바비와는 달리 강렬한 원색이 잔뜩 보인다. 하지만 루카스 로웰의 속은 그렇지 않다. 그건, 바비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과는 아직 완전하게 익지 않은 듯했다. 껍질은 제법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지만, 속은 아직 미묘하게 무르다. 이 하얀 속살이 단단하게 영글 수 있도록, 바비는 물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어느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루카스를 감싸듯 흘러나왔다.
"그거 알아, 루카스?"
이내 방금 전 팔뚝이며 얼굴을 찔러 대던 날카로운 가위가 아닌, 길고 예쁘장한 손가락이 루카스 로웰의 가슴팍을 쿡 하고 찔렀다.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펴는 루카스를 보지 못한 듯, 바비의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도망치고 싶고, 죽기 싫고, 다치기 싫고, 아프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솔직하게 말한 거,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냐. 뭐, 처음일 수도 있겠지. 그게 뭐 어때서."
퉁명스럽게 말을 툭 던져 내는 소년은 민망한 듯이 시선을 바비에게 보내지 않았다. 애꿎은 먼 곳을 향하는 시선을 따라 제 몫의 노란 눈빛을 한 번 그쪽으로 향해 보인 바비가 말을 이었다.
"바비는 늘 생각했거든. 루카스는 늘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괜히 본심을 숨기고 강한 척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 거라면 어떻게 해야 루카스의 본심을 꺼낼 수 있을까, 하고."
"......"
"궁금했어, 너의 본심이. 다른 누군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네 본심이."
"본심......"
"응, 진실된 마음 말이야. 그런데 왠지 평범한 방법으로는 영 그 모습을 보기 힘들겠다 싶었는데. 역시 이게 정답이었던 것 같네."
루카스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왜 본심을 숨기고 살았을까. 기본적으로 몇천 년을 살 수 있는 생애 중 스물다섯은 아직 너무나도 적고 어리다. 삶의 본질이며 제 성정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리고, 혹자는 아직 그럴 필요가 없으니 잔뜩 어리광부려도 좋다 말할 법한 나이였다. 하지만 루카스 로웰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정리되지 않은 한 마디를 겨우내 내뱉는다. 나는, 본심을 숨기고 강한 척하고 있었나?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멋있는 척하려고, 멋있는 모습만 보여 주려고 했던 거 아니야. 이제 와서 그런 거 해 봤자 뭐 하냐. 이미 나를 그렇게 안 보는 녀석들이 더 많을 텐데."
"으응, 그래? 그럼, 뭐였어?"
"......"
"궁금하다니까, 네가. 루카스 로웰의 이야기가."
그 말에 루카스 로웰은 녹색 눈동자를 호박석과 가만히 교차시켜 보았다. 굳은 표정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안광이 이제는 투명한 물기처럼 비치는 듯했다. 커다란 십자 모양 동공 너머로 제 얼굴이 슬쩍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그 노란색 앞에서, 저를 한 번쯤 드러내 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자그마치 이십오 년── 그 고민의 끝에 천천히 내비치는 진실된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본인의 속에서조차도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결말에 다다르려면 아직 한참은 남은, 한창 전개부의 이야기.
"──그냥, 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어. 멋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포기해도 된다고 생각이 들면, 다 내던지고 도망가 버릴까 봐."
그렇게 말하고는 루카스가 핏방울이 묻어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뜨렸다. 빗질을 그닥 성실하게 하지는 않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더 부스스해졌다.
"근데, 안 그런 녀석들이 훨씬 더 많잖아. 그러니까 몇백 몇천 년동안 사는 거겠지. 반면 이쪽은, 이름만 어른이지 너처럼 오래 산 입장에서 보면 어린애처럼 보일 테고. 그러니까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쪽도 이십 년간의 구름섬 학교 수업 과정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어엿한 '성년'의 악마였다. 하지만 구름섬 바깥에서 만난 이들은 감히 상상조차 해볼 수 없을 만큼의 세월을 살았고, 그만큼 경험이 풍부했고, 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을 해낼 용기도 많았다. 성년이라는 타이틀은 구름섬 밖에서 큰 의미가 없었다. 여전히 스스로는 작고 어린 존재였다. 아무리 커지고 아무리 오래 살아도 쉽게 뒤집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 타이틀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기분이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그저 괜찮다면서, 그렇게 보호받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내가 누구를 멋지게 지켜 주고 싶다, 뭐 그런 것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았거든."
"으응."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한 진솔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바비의 차분한 목소리는 루카스에게 가 닿았다.
"내가 이런 거에 약하다고, 그래서 버티기 힘들고 쓰러질 수도 있다고.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다른 누군가가 알아 버리면, 보호하려 할까 봐."
"헤헤, 루카스."
장난스러운 웃음 소리를 한 번 흘려 보인 바비가 손가락을 들어 루카스의 콧등을 콕 하고 찔러 냈다. 그 감촉에 루카스의 두 눈이 움찔 하고 감겼다가 떠졌다.
"보호받고 말고,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도 돼. 괴롭고 아프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된다구."
"......"
"루카스, 도망가고 싶을 땐 도망가. 그것도 방법이야."
제 쪽을 바라보는 고요한 눈빛에 묻어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루카스 로웰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드는 와중에도, 바비는 그런 자를 여럿 만나본 적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루카스의 입에서 차마 못 해냈던 말이 쏟아지듯 나오기 시작했다.
"도망갈 길이 있을 때 도망가라는 거냐? 도망 못 가고 죽어 버리기 전에?"
"응?"
"방금 네가 그랬잖아. 손톱이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솔직히 그 전까지는, 악으로 깡으로라도 버틸까 했다. 어차피 죽기 직전에는 그만둘 것 같았으니까, 너라면."
"......"
"근데 진짜로 손톱이 빠져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면. 그럼 그거, 진짜 보호받아야 하는 유리구슬이 되는 거잖아. 심지어 그 이유가 멍청하게, 자기 한계도 모르고 무턱대고 해 버린 훈련이었다고 해 봐."
어느덧 루카스를 감싸고 있던 껍질은 한 겹, 완전히 벗겨졌다. 어려운 속 이야기를 꺼내는 와중에 일인칭이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웃기는 놈이 되는 거지. ......난 그게 더 싫었다는 거고."
이내 무언가를 털어놓듯 말을 덧붙인 루카스의 뒤를 이어 바비의 목소리가 울렸다.
"루카스, 우리는 악마잖아? 인간들보다 수백 수천 년을 더 살고 쉽게 죽지 않는다고는 해도, 결국엔 죽는단 말이야."
그 말을 하는 바비의 노란 눈동자에는 아주 옅은 물기가 내비쳐졌다. 꼭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한, 우수에 어린 눈빛이었다. 아주 잠깐 스친 그 빛무리는 마치 신기루 내지는 환상이었다는 듯이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미세한 눈빛의 변화를, 루카스는 알아채지 못했다.
"바비는 말이지, 우리들의 죽음을 가장 믿지 않았어. 죽음은 인간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었다고."
"......"
"근데, 가장 고결하고 영원할 줄 알았던 케이로스도 유다의 손에 너무 쉽게 죽어 버렸고."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를 대하는 두 악마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의 '케이로스 님'은 어떤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태초의 존재, 그 미지의 베일 속에 감추어진 악마의 수장 격이었던 반면 바비의 '케이로스'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존재이자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여리고 부드러운 흙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바비도 광신도들한테 한 번 죽은 적 있었고. 다행히 바비는 콘라드가 다시 살려 줘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지만."
손가락을 꼽아 가며 제법 최근의 일을 읊은 바비의 목소리가 도로 가벼운 느낌으로 돌아오며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잠깐 밝았던 분위기의 목소리는 곧 다시 이 '훈련'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기회가 없잖아. 아무리 어리고 몸이 건강해도, 타인에게 당하는 죽음은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이런 것처럼."
바비에게 붙들린 루카스의 팔에서는 여즉 피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뭐, 고문 참기 훈련이라고 말은 하긴 했지만...... 이 훈련의 본질은 위기감 형성이랄까?"
"......그랬던 거냐. 이 훈련으로, 넌 나에게 위험을 인지하는 방법이라거나 뭐, 경각심 같은 걸 가르쳐 주려고 했었던 거야?"
이젠 마비가 되기라도 한 듯, 거의 감각이 무뎌져 가는 팔에 손이 닿자 또 한 번 아찔한 격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제 할 말만큼은 곧이곧대로 해 내는 루카스 로웰이었다.
"그런 거라면, 난 훈련의 의도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었네. 그냥 죽어라고 버텨 볼 생각밖에 안 했으니까."
"본능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거든, 위기감이라는 건."
그렇게 말하며 미처 잠그지 못한 가스 밸브,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이름 모를 풀에 들어있는 맹독 등을 늘어놓는 바비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루카스의 입이 열렸다.
"꼭 무슨, 구름섬 학교에서 듣던 안전 교육같네. 일상의 사소한 그런 것들이 위험하게 다가올 수도 있어요, 하는 그런 거. ......그러고보니 그때는 도망을 치는 훈련을 했었구나."
그런 훈련은 언제부터 안 하게 된 걸까. 언제부터, 그런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그런 루카스의 마음을 흔드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바비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직접 겪어보기 이전의 경험은, 본능적으로 그 위험의 경중을 알 수 없거든. 그러면 언제 맞서야 하는지, 언제 도망쳐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돼."
"으응."
"지금도 마찬가지. 만약에 바비가, 루카스의 팔뚝이 아니라 경동맥을 찔렀다면? 그땐 너무 늦는 거야."
"경동맥, 을."
제 경동맥 부근을 무의식적으로 쓸어 내는 루카스에게 바비가 한 마디를 더 건넸다.
"루카스, 도망도 훈련을 해야 할 수 있는 거야. 그게 도망이 방법이라고 말한 이유고. 그래야만 살 수 있고, 살아있어야 그 이후를 진행할 수 있거든."
"......살아 있어야. 그래, 살아 있어야...... 도망을 치든 싸우든 뭘 할 수 있는 건데. 왜 도망치는 게 그렇게 힘들까."
"그치만 죽음 이후는 없는걸."
"......"
"그러니까 도망쳐.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는 걸 아는 것도 힘이야."
그 말을 들은 루카스의 가슴 속에서 응어리 하나가 서서히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풀어지지는 않고, 단단하게 뭉쳐진 덩어리 하나가 둔탁하게 머릿속을 부딪히며 울리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살아야 하는 건가.'
그런 루카스의 머릿속에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별로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었다. 희미해지기 전 끄집어낸 그 기억은 도로 선명한 빛을 되찾아 확실하게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되었다. 평범한 셈법으로는 도달하지조차 못할 비현실적인 이계의 존재. 죽음은 익숙하지 않고, 여건이 맞는다면 부활마저 가능한 존재. 바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었지만, 실은 루카스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숨이 끊어졌던 적이 있었다. 피하지도 못할 만큼 다급하게 다가왔던 공격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음 이후로의 기억은 뚝 끊겨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입안에 따뜻한 것이 물려 있었다. 어린 신수의 여의주── 작고 여리지만 그 위력만큼은 대단했던 무언가였다. 어떻게든 저는 살아야 한다면서 그 입에 여의주를 물려 주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다치지 말라며 제 온몸에 서투르게 응급 키트의 붕대를 감아 주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문득 고개를 내려 보니 바비의 손에도 붕대가 들려 있었다. 평소보다 더 꼼꼼하고 세심하게 루카스의 팔뚝을 둘러 내고 있었다.
"원래 다 그래. 도전은 많이, 도망은 포기. 도망가는 것조차 포기하는 것 같고 스스로 실패작이 되는 기분이 든다고 하잖아. 그래서, 포기하는 것마저도 포기해 버리는 거지. 그 패배감이 두려워서, 도망치는 것도 꺼리는 거야."
"......"
"하지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후퇴한다고 하기도 하거든.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이런 말 들어 봤지?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난다고 생각하면 좀 나아질까."
"후퇴도, 뭐 비슷한 말 아니냐. 그런 지혜라는 것들,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아직...... 그냥 핑계 같기도 하고."
피가 나니까, 아프니까, 훈련을 잠시 그만두고 쉬었다가 돌아온다고 해서 날카로웠던 가위가 뭉툭해지는 것도 아니고 팔이 덜 아파지는 것도 아니다. 딱히, 더 나을 결과라고 할 만한 건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루카스 로웰은 더, 죽어라고 버텨 보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들이 들 무렵 즈음 해서는, 그 끝에 얼굴을 슬쩍 내비친 딸기 소다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악마가 보였다. 응어리를 풀려면, 어떤 질문을 해 보면 좋을까. 천천히 입안에서 굴려 보고, 또 그 짧은 시간에 수백 번 말을 고친 신중한 한 마디를 내뱉어 보았다.
"──바비. 궁금한 게 생겼는데. 넌 이런 거, 언제 알게 된 거냐. 도망쳐도 된다는 거, 도망칠 때가 있다는 거...... 어떻게 하다가 알게 된 거야? 케이로스 님이 알려준 거야?"
그 말에 바비는 치료를 마친 루카스의 팔을 툭, 하고 내려놓았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그 상처를 온전히 덮은 하얀 붕대가 루카스의 다리 옆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던 바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번도 내비쳐본 적 없던 진심을 고스란히 꺼내어 보이는 루카스에게 화답하듯, 바비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이야기 조각도 그 비밀스러운 베일 한 겹을 벗어내기 시작했다.
"......음, 그건. ......맞아, 케이로스가 알려 줬어."
그 진중한 한 마디를 건네는 바비의 눈동자는, 선명한 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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