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파르-로타네브 CP (제로) 헌정 로그 (2)
편의상 루카스 카테고리에 넣어 두었지만 루카스는 나오지 않음.
군부물AU 기반, 두 만화천재가 차력쇼하던 8p 만화를 기반으로 함. 이건 뒤의 5p를 기반으로 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급발진이 너무 심했던 이슈로 한 4.5페이지 정도까지만을 기반으로 합니다. 나머지는 급발진 및 빌드업의 결과물. 사실 빌드없.
다음 페이지도 주세요. 이 글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Code Breakers (1)> 과 이어집니다. (바로가기 링크)
"......"
로타네브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그리 넓지 않은 방안을 빠르게 훑었다. 방금 전 그가 노트북 화면을 켠 채로 카메라의 화면을 해킹하던 지하실 구석의 반절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공간에는, 가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대략 예닐곱 명이 둘러앉을 만한 크기의 네모난 테이블, 그리고 같은 색깔의 의자 몇 개. 테이블의 위로는 구식 전구처럼 희미한 빛을 내는 조그만 전등 하나가 겨우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몸을 조금 움직이니 끼익, 하는 기분 나쁜 높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모된 바닥에 의자 다리가 끌리면서 나는 마찰음이었다. 손을 움직이는 것마저도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새삼 강하게 느껴졌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로타네브의 눈이 문 쪽을 향했다. 안경은 진작에 벗겨져 어디로 갔는지 모를 노릇이었지만,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괜찮았다. 애초에 두꺼운 뿔테 사이에 끼워져 있던 건 렌즈가 아니라 유리였으니까. 그저 맨눈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패션 아이템처럼 대충 걸치고만 있던 안경이었다. 뭐, 로타네브 본인은 멋있어 보이려고 쓰고 다닌 게 아닐지 몰라도.
"──재미없게......"
문득, 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휙 하고 돌린 로타네브의 심장이 한 번 더 쿵, 내려앉듯 큰 고동을 만들어 내었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향해 몸을 슬쩍 더 기울여 보았다. 제 몸무게에 무언가가 얹힌 것마냥 묵직한 것이 달려 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몸을 기울이면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주 미세하게 문 쪽에 가까워지려고 시도할 때마다 삑삑거리는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렸다. 재미없게, 담배나 한 대, 고리타분해, 알아서── 뭐 그런 단어들이 중간중간 어렴풋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로타네브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도 공포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주변이 어떻든 간에, 저는 저 나름대로 제 할 것만을 해 내면 되었기에. 그렇게 알아 왔고,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기에.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핫──'
한껏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바짝 곤두서던 청신경과 사고력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산산조각나 버렸다. 공기 중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집중력은, 로타네브로 하여금 '진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문이 열리며 어두운 방안으로 들어온 것은 예의 그 남자였다. 여전히 역광이 진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파란색보다는 빨간색이 아주 조금 더 많이 섞인 듯한 보랏빛만이 그림자 진 얼굴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로타네브의 호흡이 유해한 가스를 양껏 들이마신 것처럼 아주 조금 가빠졌다. 넓지 않은 방에 남자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대기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답은 안 할 건가?"
그것은, 로타네브가 들었던 그 남자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 이후 제 옷깃을 끌어올려 어딘가로 데리고 가는 동안 그 남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외곽 지역의 구석진 곳에 우뚝 서 있는, 무언가의 고성 같은 건물의 어둑하고 음산한 곳. 복도와 계단을 몇 겹 더 지나치고 나서야 비밀스러운 공간이 하나 나왔다. 그때까지도 로타네브의 옷깃을 단단히 그러쥐고 있던 남자의 손길은 그제서야 천천히 떨어졌다.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한 복도 끝의 문을 열자, 불이 켜진 실내 공간이 하나 나왔다.
'......'
로타네브에게는 충분히 자아와 의지가 있었으며, 남자가 손을 놓은 탓에 몸이 자유롭기도 하였다.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려나갈 수 있었다. 지하실 구석에 내던지고 온 컴퓨터와 통신 장치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제 몸 하나만큼은 건사할 여력이 있었다. 저를 이곳까지 끌고 들어온 남자의 달리기가 얼마나 빠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친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았을 테니까.
"......여기는?"
하지만 로타네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남자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들어왔다. 문을 여는 남자의 등 뒤를 쫓아갔고, 불이 켜져 있음에도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을 눈에 담았다. 노란 전등이 밝게 들어온 곳에는 컴퓨터 모니터가 몇 개 더 놓여 있었고, 사분할 된 화면은 빈 방을 담아내고 있었다. 네모난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는 어두운 방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지하실에 버리고 온 노트북이 생각나 더욱 아쉬워졌다. 레포트 작성부터 해킹까지,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일을 함께한 노트북이었는데.
로타네브의 그런 마음은, 그의 앞에 우뚝 버티고 선 남자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방의 한쪽 구석에 방독면을 던지듯 내려놓은 남자는 다시금 로타네브의 옷깃을 말아 쥐었다. 그 단순한 손길에 로타네브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무서웠다. 이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노릇 아닌가. 로타네브는 세상을 잘 알지 못했고, 지금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미지라는 것은 곧 탐구 주제, 즉 흥미로운 것으로만 생각했던 로타네브에게, 미지에서 오는 '공포'는 두 배의 감각적인 자극을 주었다. 그 자극이 사정없이 심장과 뇌를 괴롭히며 그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아, 잠, 잠깐......"
웅얼거리듯 겨우내 입밖으로 삐져나온 로타네브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남자는 그의 옷깃을 끌어 다른 쪽 구석에 있던 조그만 문을 열어 내며 로타네브의 머리를 슬쩍 눌렀다. 어디까지나 남자에 비해 키가 작을 뿐, 절대적으로 작지는 않은 로타네브는 떠밀리듯 구석진 방으로 몸을 들였다.
"......"
그때 즈음부터, 로타네브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달관했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툭 건드리면 울기라도 할 것마냥 물기가 어리기 시작한 눈동자에는 공포가 잔뜩 묻어나기 시작했고, 어쩌면 눈물과 함께 그것을 쏟아낼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답지 않게 움츠린 어깨를 덮은 체크무늬 남방 셔츠는 이미 땀에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남자는 대충 근처에 있던 의자를 빼 오더니, 로타네브의 양어깨를 손으로 눌렀다.
"......으아."
뭐, 그 손길에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 모른다. 저보다도 훨씬 더 건장한 체격에, 말없이 저를 찍어누르듯 하는 그 거친 손길에는, 그저 홀린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단단하고 짙은 나무 목재로 된 의자가 흔들리며 삐익, 하는 소리를 내었다. 꽤나 오래된 의자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에 손은 어느새 등받이 뒤로 향해 있었다. 스륵, 하는 가벼운 소리가 은근하게 청신경을 자극한 후로부터는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다. 의자 등받이 뒤로 돌아간 두 손은 의자에 딱 붙은 채 두툼한 밧줄로 감겨 있었다. 정신이 아득한 별하늘을 향하기 시작한 로타네브의 비현실적인 시간 감각 속, 남자는 로타네브의 몸을 의자에 '묶어' 놓고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빼 그 앞에 앉았다.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어, 으, 그러니까......"
무어라 할 만한 내용도 없는 그 짤막한 몇 글자의 조합을 입 밖에 꺼내는 것에도 로타네브는 엄청난 용기를 내었다. 언제나 스스로는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분석과 논리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떨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저를 무심히 바라보던 남자의 입술이 슬쩍 열리려던 순간, 좁은 공간의 바깥에 있는 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결국 남자는 다시 일어서 방 밖으로 나갔고, 벌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는 어둡고 조그만 방에 로타네브는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어디선가 미묘하게, 매캐한 약품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로타네브의 신경은, 그렇게 방 밖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맥락을 추론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단어가 몇 개 더 들린 이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현재, 어두운 방안으로 남자가 들어왔다.
"......"
"........."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로타네브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것 같지만 결코 별처럼 순수한 반짝임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로타네브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버렸다. 남자는 그마저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름."
"헉── 어, 네?"
이 조그만 방에는 시계조차 없었기 때문에 야속한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각마저 무디어질 때쯤, 침묵을 깬 것은 남자의 동굴 같은 저음이었다. 시끄러운 것과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 거는 것. 이 두 가지를 불편해하던 로타네브에게마저도 이 어색한 침묵이 부담으로 다가오던 찰나 들려온 남자의 질문에, 그만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로한."
제 이름을 묻는 남자의 질문에, 로타네브는 한 겹의 방패막을 세워 보았다. '로한'이라는 이름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쓰는 가명이자 콜 사인이었으니까.
"로한?"
"......"
남자는 끄덕이지 않았다. 의도가 어땠을지는 몰라도, 그저 그 이름을 한 번 더 입에 담아 보았을 뿐이었다. 어느새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빳빳한 재질의 바지 자락이 허벅지 근육의 모양에 맞게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로, 로타네브. 로타네브......"
결국 얇게 세워 두었던 방패막은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조명이 확실하지 않은 탓에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었지만, 눈가에 선명하게 새겨진 십자 모양의 흉터가 로타네브의 눈에 선연히 비추어졌다. 아까부터 몇 번을 삼켰는지 모를 침 때문에 목구멍이 당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끝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내 뱉어 내는 제 이름이 어색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 저기, 음......"
"내 이름을 알고 싶은 건가?"
세로로 길게 찢어진 자수정이 로타네브를 꿰뚫어내듯 말했다. 로타네브는, 정확히는, 그 남자의 이름보다는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앞으로 자신이 겪게 될 운명에 대한 것이었지만.
"제파르.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 소속. 이 정도면 충분한가?"
로타네브가 여태껏 들었던 남자의 말 중 가장 긴 문장이었다. 제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 카드처럼 생긴 것을 꺼내 테이블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는 것을 보기 위해 로타네브의 상체가 앞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의자에 묶인 손은 그대로 고정된 채 몸만 앞으로 숙이느라 전신이 쏟아지듯 불안정한 흔들림이 생겼다. 겨우 균형을 잡은 로타네브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깔끔하게 생긴 신분 카드였다. 그의 소속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면, 어딘가의 회사원이라고 생각할 만큼 세련된 카드였다.
"아르크튜러스......"
"너나 네 동료들에게는, 반정부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가?"
"도, 동료라니."
"섬멸 대상, 처리 대상, 골칫거리, 기타 등등...... 참, 그러고보니 소속을 묻지 않았군. 소속은 어디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소속? 어, 음. 그, 저기 대학교, 화학과 3학년──"
섬멸 대상, 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들려 오는 제법 호전적인 이름들은 어딘가 살벌한 감이 있었다. 새삼, 미운털이 잔뜩 박힌 반정부 조직의 본거지에 제 발로 기어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로타네브의 머릿속을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변함 없는 일관적인 보랏빛의 아래에서, 그는 거짓을 고할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아니, 그거 말고."
"이거 말고......?"
"내가 궁금한 건, 정부 어떤 조직 산하인지, 그건데. 아, 정부 조직 구성이라거나, 세부 정황을 알려줄 수 있으면 더 좋고."
막 말을 배운 어린아이가 서투르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남자의 말끝을 따라한 로타네브를 이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알려줄 수 있으면 알려 줘, 표면적으로 상냥해 보이는 말 뒤에는 어떻게든 알아내겠다, 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져 로타네브는 어깨를 가볍게 떨어 내었다. 이번에도 거짓을 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타네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소속'이 아니라 '고용'의 형태였기 때문에,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 진짜 몰라.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야."
"전부, 라기에는. 아무것도 말한 게 없는데?"
"그러니까......! 난, 난 아무것도 몰라.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로타네브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이성을 잃은 듯 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반면 남자의 목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처럼, 그저 무심하게 로타네브의 겁에 질린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후, 하고 작은 숨을 내쉰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구도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압박과 공포를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아마 이 남자는, 로타네브가 여즉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정작 로타네브는, 그의 모든 순수한 진심을 전부 내비친 상태였지만.
"정말 정식 정부 소속이 아니라고?"
"그, 그렇다니까......"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로타네브를 보지 못하기라도 한 양, 남자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외부에 해킹을 맡길 정도로 정부에 인재가 없나?"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손이 로타네브 쪽으로 향했다. 순간 몸을 움찔, 숙이며 두 눈을 질끈 감은 로타네브의 턱 밑에는 어느새 남자의 두툼한 손바닥이 들어와 있었다. 시선을 바닥에 내리깐 로타네브의 턱을 받쳐 든 남자의 손이, 로타네브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숨길 생각 말고 다 말해."
꼭 사형 선고처럼 들리는 단조로운 말을 뱉어 내는 남자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는 천장 조명 말고도 하나의 조명이 더 생긴 듯한 느낌에, 로타네브의 뺨에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미 숱이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은 땀에 잔뜩 젖어 얼굴에 여기저기 들러붙은 상태였다. 단추를 끝까지 채워 올린 체크무늬 남방 안쪽에서 훅 끼쳐 오는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 때문인 건지. 로타네브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고, 관자놀이와 목 부근에서 흐르는 땀 줄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두려움이 섞인 침을 애써 크게 삼켜 내느라 목울대가 몇 번이고 연속해서 꿈틀거렸다.
"내가 아는 건 이게 정말 다야......! 진, 진짜니까......"
목울대로 침이 넘어가지 않을 무렵에 입술 바깥으로 겨우 새어 나온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며 간신히 문장을 만들어 내었다. 그때까지도 로타네브의 턱 밑을 받쳐 부드럽게 들어올리고 있던 남자의 손 때문에, 로타네브는 남자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마저도, 형형한 자줏빛 보석처럼 빛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무렵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불게 만들면 되겠군."
"네, 어, 에......?"
바보처럼 새된 소리를 내는 로타네브의 옷깃을, 남자가 다시 한 번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두운 색깔의 긴소매 상의 속에 숨겨진 두꺼운 팔 근육이 순간적으로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깃을 잡은 남자의 팔이 한 번 좌우로 움직이자, 로타네브의 몸도 그 방향에 따라서 휙, 하고 흔들렸다.
"히, 아── 자, 잠깐만! 그러니까 난,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면, 선택지가 필요한가?"
"모른다니까...... 선택지?"
마치 대답을 곤란해하는 로타네브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양,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며 로타네브의 귀에 가 닿았다. 이내 방 한쪽 구석으로 발을 옮긴 남자는 손에 작은 병을 하나 든 채 돌아왔다. 어차피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조그만 실내 공간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 번."
방독면은 방금 바깥쪽 방에 던져 두고 온 것 같았는데, 어느새 목 부근에서 넥워머 형태의 마스크를 올려 코와 입을 덮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병의 뚜껑을 슬쩍 돌려 열어 로타네브의 코 밑에 가져다 대었다.
"컥, 크흑, 쿨럭, 아, 아아──"
아까부터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하던 로타네브는 무심결에 병에서 나온 무언가를 들이마셨다. 여린 코 내부의 점막을 파고들어 위로, 아래로. 목과 뇌, 눈을 동시에 파열시키는 듯한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방금 것은 맛보기 체험이었다는 듯이 도로 뚜껑을 돌려 닫은 남자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로타네브는 정신까지 아득하게 침범하는 듯한 격통에 쓴 기침을 계속해서 뱉어냈다.
"이, 이거 대체, 무슨......"
로타네브는, 저릿한 뇌세포 사이를 더듬어낸 결과 몇 개월 전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화학 약품이며 가스를 종종 다루는 로타네브에게, 방금 마신 무언가의 물질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때 교수가 뭐랬더라,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었나── 뭐, 꼭 그런 내용은 아니었더라도, 아무튼 아무렇게나 들이마시기 좋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적으로도 알 수 있었다.
"허억, 하아, 하아......"
"이 번."
이따금씩 몸을 움찔거리며 비틀어 대고는, 거친 숨을 내쉬며 호흡을 겨우 진정해낸 로타네브의 귓가에 남자의 짤막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 왔다. 남자는 작은 병을 도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손으로 로타네브의 목깃 부근을 은근히 그러쥐었다.
"허억──"
남자는 옷을 쥐었을 뿐인데, 꼭 목을 졸리기라도 한 것마냥 로타네브의 목에서 다시금 새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목깃을 그러쥔 남자의 팔이 굽어지며, 두 사람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제 로타네브의 시야에는 남자의 태닝한 듯한 얼굴만이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남자의 눈을 아주 잠시 마주해 보려 시도했다가, 이내 다시금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때까지도 로타네브의 옷을 꾹 쥐고 있던 남자의 손이 한 차례 강하게 흔들렸다.
"아아......!"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때린 것도 아니고 넘어뜨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목 부근의 칼라를 말아쥔 채로 흔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별 거 아닌 듯 떨어지는 남자의 손가락 틈새로, 까맣고 조그만 플라스틱 조각 두 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로타네브의 목덜미를 스치며 서늘한 공기가 파고들었다.
"......"
학교 근처 옷 가게에서 싼값에 여러 벌을 무더기로 산 체크무늬 남방 셔츠에 매달린 플라스틱 단추는 그리 끈질기지 못했다. 그 손길 한 번에, 조그만 방의 구석으로 각자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 버렸다. 늘 셔츠를 목 끝까지 꼭꼭 걸어 잠그는 로타네브에게, 단추 몇 개를 야심차게 풀어헤치는 쿨한 패션은 익숙하지도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리 추운 것도 아니었지만, 로타네브는 또 한 번 등줄기를 타고 피어오르는 소름에 몸을 슬쩍 떨어 내었다. 만개하는 덩굴 식물을 빨리감기한 어떤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그의 몸에 있는 모든 신경과 혈관 줄기들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끝까지 전해져 왔다. 고작해야 단추 두 개로 덮여 있던 목과 가슴 위쪽이 드러났다. 로타네브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더욱이 바깥에 노출될 일 없는 피부는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편이었다. 그런 가슴 부근을 스치듯 지나가던 남자의 흉터 진 손과 확연히 대비되는 색깔이었다.
로타네브는, 이제 미지에서 오는 공포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말수가 적고 그렇기에 예측할 수 없는 이 건장한 남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조차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아직 해 보지 못한 공부가 너무나도 많기에 스물몇의 창창한 나이에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로타네브였지만, 차라리 저 남자가 이 자리에서 널 죽이겠다며 사형 선고를 내렸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무간지옥의 공포 속에서 길을 잃고 사방을 헤맬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감히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로 앞가슴에 와 닿는 서늘한 공기를 겨우 무시한 채 슬쩍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꾹 다문 입술과 정적인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다만 남자는, 저를 올려다보는 로타네브에게 무심한 듯한 시선을 던져 주고는 말을 이었다.
"삼 분. 삼 분이면 충분한가?"
"어어? 뭐, 무슨......?"
"삼 분 후에 다시 돌아올 거다. 그때는 고민이 끝내고, 선택했으면 좋겠군."
"서, 선택이라니. 잠깐, 잠깐만!"
일 번부터 이 번까지, 고작해야 두 개의 선택지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남자가 문 쪽으로 다가서더니 바깥쪽 방으로 나갔다. 두 번째로 혼자 남겨진 로타네브의 뇌 속에서는, 복잡한 코드 수식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선택? 방금 그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인가? 블랙아웃이 오기 시작한 로타네브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채우는 것은, 몇 시간 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떠오르던 코드보다도 복잡했다. 색색의 글자와 숫자와 기호가 한데 뒤엉켜, 무언가를 제대로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태어난 이래로, 심장이 이렇게 빠르게 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눈앞이 이렇게나 흐릿해질 수도 있는 것이었던가. 극한까지 치닫은 공포가 선사하는 나이트메어, 눈을 반듯이 뜬 채 정신까지 야금야금 좀먹는 듯한 감각에 착실하게 사로잡히고 있었다.
남자가 돌아온 것은, 딱 그 무렵이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정확히는, 생각이라기보다 회상에 가까웠다. 그건 무엇이었지? 분명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매일같이 그곳을 돌아다녔고, 외곽 지역의 이 건물은 그에게 있어 더없이 익숙한 공간이었다. 매일 잠을 자는 침실과 매일 들락거리는 상관의 사무실, 그리고 매일 걷는 복도. 몇 시간 전에도, 그저 익숙하고 단조롭고 똑같을 뿐이었다. 매일 쓰는 방독면을 쓴 채 매일 나가는 작전, 매일 똑같은 메인 홀을 지나 매일 똑같은 복도를 걷는다. 매일 똑같은 위치에서 매일 똑같이 잉잉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산스럽게 돌아가는 CCTV 카메라까지. 남자의 일상은 지독하게도 일관적이었고, 재미있는 요소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역시도 구태여 재미를 찾아 나서는 타입이 아니었다.
'......'
그날의 CCTV가, 유독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늘 그 자리에서, 늘 똑같은 소리를 내며 복도를 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오른쪽을 비추다가 움찔거리며 왼쪽으로 조금 틀어지는 그 작은 움직임은, 비일상적인 것이었을까. 계기야 어떻든 간에, 남자─제파르─는, 일상의 침투한 비일상의 조각, 그 조각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잡아낸 것이, 고작해야 정부의 돈을 받아먹는 일회용 해커라니.'
늘 틀에 박힌 루틴대로 살아가기에 감정 같은 건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제파르에게, 오늘만큼은 유독 본능이 마음 한구석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렇게 본능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들어간 지하실 한구석에서, 모르는 남자와 조우했다. 미세하게 고개를 움직이던 CCTV처럼, 남자는 겁에 질린 채 이쪽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떨고 있었다. 나름 호기롭게 들어온 것 같은데, 이럴 거면 왜 온 거지? 정부 소속일 것이라고 추정되었던 그 남자는,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제파르는 '고문'이라는 것을 선택하였다. 어딘가 뒤가 어두운 구석이 있는 이 조직의 본거지 깊숙한 곳에는, 취조실을 가장한 '고문실'이라는 공간이 존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문패에 걸린 이름과는 달리 화사한 조명과 멋진 컴퓨터가 늘어서 있는 방이 나온다. 제파르의 목적은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의 방'이었지만.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늘어진 고무줄로 겨우내 고정시킨 남자를 끌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제 손에 들리다시피 하여 얌전히 따라온 남자는 의자에 몸이 꽁꽁 묶이면서도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않았다. 별난 녀석이었지만, 적어도 귀찮게 굴지는 않으니 다행인 셈이었다. 제파르가 워낙 평균에 비해 큰 감이 있었지만, 이 남자 정도의 체격을 가진 사람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면 그로서도 처리가 힘들어질 거라고, 제파르는 생각했다.
눈앞에 앉아 겁먹은 표정으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남자. 제파르는 이 남자가 궁금했다. 일상의 흐름 속 등장한 비일상. 그야말로 비일상으로 점철된 '비일상 덩어리'인 이 남자는 제파르의 정신 깊숙한 곳에 있는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뭐, 대충 호기심──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겠지. 아니면, 저희들의 뒤를 캐러 들어온 쥐새끼 같은 존재니까, 일 초라도 빨리 그 싹을 잘라 내야 한다는, 뭐 그런 생각이었다거나.
그러나 남자에게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밖에서 거슬리는 잡음이 들려 왔다. 결국 무언가의 본능을 슬쩍 눌러 내고 밖으로 향했다. 일단은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동료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자들이었지만, 그닥 큰 전우애도 관심도 없는 이들이었다.
"제파르?"
"네가 왜 거기서 나오지?"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마주하는 듯한 말투에 묻어나는 것은, 그쪽도 제파르에게 유의미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순찰하다가. 숨어 있던 뭘 좀 찾아내서."
"오, 한 건?"
눈썹을 슬쩍 휘어 올리며 묻는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제파르는 등을 돌려 안쪽 방의 문을 찾았다. '동료들'에게 전해줄 만한 정보는 다 전해준 것 같았다.
"그래서, 고문실에 네가 들어가려고?"
"......"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별 생각없이 던져 오는 물음에 멈추어 선 제파르가 다시 반 바퀴를 돌아 그들을 마주했다.
"그럼, 누가 들어가지? 내가 찾아낸 생쥐니까, 내가 심문하는 게 맞지 않나?"
"그래, 누가 뭐래? 그럼 수고해. 재미없는 제파르가 들어갔으니, 고문도 재미없게 하겠군."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면 안 되나~"
"......"
더 들을 만한 가치는 없어 보였다. 별 의미 없는 한숨을 내쉬는 제파르의 등 뒤로 동료들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고리타분해. 좀 더 융통성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알아서 하겠지, 놔 둬라."
명백히 저를 겨냥한 말이었지만, 제파르의 신경을 긁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제파르에게는, 수군대는 동료들보다 안쪽 방에서 겁먹은 눈으로 떨고 있을 남자가 더 중요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이 느낌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야 제파르는, 수 년간 틀에 박힌 삶을 사느라 제 감정을 심오하게 고찰해 보지 않았으니까.
남자의 이름은 로타네브라 하였다. 어딘가의 대학교 화학과 소속이라는데,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들을 노리는 정부 조직 산하의 누군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공허함 비슷한 것이 밀려 올라왔다. 한 건이 아니라 반 건이었다. 땀에 젖은 채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은 그의 체격과 어울리지 않았고,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래진 얼굴은 빈말로라도 보기 좋은 모습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제파르로 하여금 남자를 탐구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언젠가, 이 조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가 생각났다. 아르크튜러스, 하늘의 수호자── 있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 나라의 근간을 닦는 정부에는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정부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그들의 근거지를 지켜보다 떠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언제쯤 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디자인의 건물에 철거차와 압류 딱지를 보낼지 틈을 노리는 듯한 몇몇 사람들을,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 대원들은 재주 좋게 잡아 내었다.
이 조직의 구체적인 목표, 위상, 앞으로의 전망── 으레 신입이 들어오면 어딘가의 고지식한 상사가 늘어놓을 법한 정보보다, 제파르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먼저 배웠다.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아라, 입을 열지 않는다면 열게 만들어라, 고문실 한쪽 구석에는 독한 가스가 담긴 작은 병이 있다── 인수인계를 하듯 담담하게 뱉어 내는 상관의 말을 기계적으로 들으며, 몇 년 전의 제파르는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일'을 시작했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가지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시리우스처럼 찬란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대하며 종국에는 울부짖는 목소리로 빠르게 필요한 정보를 뱉어내게 하였다. 또 누군가는 카노푸스처럼 은밀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대하며 종국에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씩 필요한 정보를 꺼내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도, 제파르는 아르크튜러스였다. 어찌 됐든 그 역시도 '고문'을 성공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다는 점에서, 북쪽 하늘에서 빛나는 아르크튜러스. 그러나 조금만 더 범위를 넓혀 본다면 결코 가장 능숙하고 익숙하지는 않은, '세 번째', 아르크튜러스.
그런 그에게, 오늘의 시도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말, 아니면 가스. 그도 아니면 주먹. 세 가지만으로 '사람을 대했던' 제파르는, 로타네브의 목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흔들었다. 손바닥에 잠시 얹히는 듯하다가 손가락 사이로 튕겨져 나가는 조그맣고 검은 플라스틱 조각을 보며 제파르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 남자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투둑, 하고 무언가가 튿어지는 소리가 은근하게 청신경을 건드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 감정의 근원도, 원인도, 상태조차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제가 옷깃을 쥐고 흔들어 냈기에 목과 가슴 윗부분까지 하얗게 드러낸 로타네브만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앞쪽 허벅지에 슬근한 감각이 전해져 왔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지시를 내리는 본능을 겨우내 조용히 시키고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저 너머에서, 방금 전의 그 '동료들'이 CCTV를 통해 이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선택지가 필요한가?"
어이없게도, 제파르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은 그것이었다. 선택지를 주어서 뭘 할 거지? 이미 뱉어 버린 처치 곤란의 문장을 애써 덮으려는 듯,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한 뒷맛을 남기는 감정이 묘하게 잔재하는 마음에 바깥쪽 방으로 향했다. 삼 분, 그 정도면 '동료들'을 쫓아내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아니면 때려눕히거나. 그런데 왜 쫓아내고 싶은 거지? 그런 생각이 뇌리 속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길을 잘못 든 것처럼 다시 쏙 사라졌다.
"......"
약 오 초 뒤의 제파르가 마주한 것은 텅 빈 방이었다. 정말 담배라도 한 대 피우러 간 것인지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뢰가 높은 건지, 없는 건지. 극과 극을 오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오히려 잘 되었다. 삼 분씩이나 그들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실제로 삼 분이 지났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제파르는 다시 로타네브가 있는 방으로 발을 옮겼다.
"그래서, 고민은 끝났나?"
나무 판자로 된 문을 밀어 열며 제파르가 물었다.
"어, 어어......"
돌아오는 것은 움찔거리는 대답뿐이었다. 몇 번, 하고 묻는 제파르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고문실 안쪽 방에 잠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로타네브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대답을 기다리듯 팔짱을 낀 채 한쪽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제파르의 목소리였다.
"아니면, 선택권을 포기할 건가? 그럼 내가 선택하고."
제파르는, 본인이 어떠한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선택지를 줘 놓고, 결국 제가 선택을 한다니.
"......로타네브."
끝이 미묘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제파르는 로타네브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다.'
그 문장은, 굳이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제파르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목깃보다 조금 더 아래의 옷자락을 쥔 채, 그때까지도 허벅지 부근에서 거슬리던 조그만 약병을 꺼내 아예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이 번. 제파르가 선택한 것은 그것이었다.
'루카스 로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비X루카스 Non CP] Keeping Braveness Longingly (2) (0) | 2025.03.06 |
---|---|
[바비X루카스 Non CP] Keeping Braveness Longingly (1) (0) | 2025.03.05 |
[제로] Code Breakers (1) (0) | 2025.03.01 |
루카스 로웰 오프 더 레코드(오프레) AU 정리 (0) | 2025.02.28 |
루카스 로웰 프로필 (0) | 2025.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