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파르-로타네브 CP (제로) 헌정 로그 (3) (完)
편의상 루카스 카테고리에 넣어 두었지만 루카스는 나오지 않음.
군부물AU 기반, 두 만화천재가 차력쇼하던 8p 만화 기반.
뒷부분은 썰과 혼합, 여기에 제 사심 및 망상 크게 세 스푼.
<Code Breakers (1)>, <Code Breakers (2)> 와 이어짐.
(1편 보러가기 링크) (2편 보러가기 링크)
"으윽, 흐, 아아──"
"......"
전등을 켜지 않아 컴컴한 방에 얕고 높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꼭 양질의 쿠션에 잔뜩 파묻힌 듯 끝이 먹혀 들어가는 소리다. 커튼 한 겹으로 가리워진 창문 틈새로 청백색 달빛만이 어슴푸레하게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달빛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하얀 나신을 완전히 드러낸 로타네브의 입가를 비집고 계속해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 옆에 미끄러지듯 기댄 제파르의 입에서는 제법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성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닐 뿐, 분명히 그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열감이 느껴지는 두 목소리가 지금 이곳을 채워 내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무언가의 물기로 축축해진 제파르가 흥미로운 장난감의 단추를 눌러 보듯, 로타네브의 몸을 쓸어 내고 이따금씩 멈추어 자극해 나갔다.
"아──"
특정 센서를 건드리면 소리가 나는 인형처럼, 그럴 때마다 로타네브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곤 했다. 질척이며 진득하게 엉겨 붙는 소리와 함께 두어 번의 짧은 목소리가 새어나온 후에는, 끝이 조금 갈라진 제파르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 공간을 울렸다.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이 공간을 가득 메우며 분위기를 주도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더 할 말은 없나?"
"어, 없다니까. 진짜 내가 아는 건, 흐윽, 이게 다라니까......!"
처음 건네는 말이라는 듯이 무심하게 던진 제파르의 물음에, 로타네브는 이미 수천 번도 더 들은 말이라는 듯이 답했다. 이 짓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고문실이 아니다. 고문실처럼 이 독특한 건물 구석 깊은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었지만, 이곳에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 평범하게 널린 어느 가정집의 방처럼 보이지만 창문에는 쇠창살이 단단하게 쳐져 있었고, 방문 밑으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독한 약품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다정한 생활감이 느껴지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가두고 감시하려는 새장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일전, 저를 고용한 집단과 맞서는 조직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호기롭게 적진으로 침입한 로타네브는 완벽한 성공과 화려한 복귀를 코앞에 둔 채 붙잡히고 말았다. 흔히 스릴러 영화라면 납치된 주인공이 멋지게 적들을 물리치고 이 요새를 탈출해야 하기 마련이지만, 안타깝게도 로타네브에게는 그만큼의 신체 능력과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등장만으로도 공기를 한층 무겁게 눌러 내는 듯한 남자에게 그저 붙잡혀서, 심지어는 고문까지 당했던 사정이었다.
"진짜, 진짜 모른다고, 그때 말했잖아......"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게 다가오던 역한 가스 냄새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별로 추운 것도 아니지만 드러난 두 어깨를 떨어 내며 로타네브의 목소리가 겨우내 말을 이었다.
그날도 오늘과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제파르는 로타네브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주었다. 죽거나, 죽지 않고 말하거나. 생각할 시간은 딱 삼 분.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삼 분이 지나고 돌아온 제파르는 로타네브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유의미한 언어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도 대화 비슷한 것을 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소통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조금 있었으니 말이다.
"잠깐, 잠깐만......"
부욱, 하는 탁한 소리와 함께 로타네브의 체크무늬 남방에 매달려 있던 다른 플라스틱 단추들도 고문실의 이곳저곳 구석으로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 버렸다. 공기 중에 완전히 드러난 복부를 스치듯 바람결이 일었다. 순식간이었다. 그 순간의 상황을 파악해 내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로타네브의 등이 단단한 나무 책상에 닿았다. 특별히 야외 운동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타네브의 몸에는 나름 근육이 탄탄하게 잡혀 있는 편이다. 하지만 제파르의 힘은 그보다 더 셌다. 순간적으로 로타네브의 어깨를 잡아 책상에 눕히듯 밀어 놓고는, 그 위에서 기둥과 천장을 쌓듯 로타네브를 내려다보았다. 나무 책상에 등을 댄 로타네브의 몸체 옆으로 팔을 짚어 내었다. 거칠거칠한 긴소매 속에 숨겨진 단단한 팔 근육이 로타네브의 양쪽에서 제파르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 나 정말로 고용된 거야, 고용된 거예요! 그래서 기록에는 없는데......"
어두운 방안에서 역광 그림자가 진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로타네브의 입에서 빠르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제파르는 여전히 그 특유의 자줏빛 눈으로 가만히 로타네브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에, 다른 작전에서 해킹하는 임무도 했었고...... 진짜예요, 거짓말이 아니라......!"
다급한 듯 서툰 경어가 재게 흘러나오는 것을 듣던 제파르의 손이 움직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로타네브의 몸은 그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흑, 잘못했어요, 잘못했......!"
겁에 질린 듯 잔뜩 떨리는 목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가 입을 막기라도 한 듯 뚝 끊어졌다. 제파르의 손가락이 로타네브의 어떠한 곳을 파고들어 누른 것이었다.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는 단추라도 되는 양, 로타네브의 허리가 빳빳하게 세워졌다. 방금 전 심문을 당할 때처럼 허억, 하고 호흡을 겨우내 들이켰을 뿐이었다.
"흑, 우윽...... 아, 아파요. 흑......"
이렇게 하면 이 남자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제파르는 생각했다. 사실 확실하지는 않은 방법이었다. 선배들에게 배운 방법도 아니었고, 자신이 이전에 해본 적 있는 방법도 아니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저 철저히 본능에 이끌린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이내 찰칵, 하는 가볍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로타네브의 하의는 더 이상의 존재 가치를 잃었다. 그의 다리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려가 신발 코끝에 겨우내 걸쳐 있기만 한 옷자락에 슬쩍 시선을 던진 뒤, 제파르의 손가락은 이전보다 대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려하게 근육이 잡힌 로타네브의 복부를 가로지르는 틈을 따라 쓸어내리던 손은 어느덧 속옷 안쪽의 불룩한 것을 쥐고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든다면,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던 스팟이 드러날 것이다.
본디 고문이라는 것은, 하는 사람에게도 당하는 사람에게도 그닥 유쾌하지 않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다. 찌걱이는 물소리와 이따금씩 들려 오는 신음 소리가 제파르의 귀에 선연히 흘러들어왔다. 이상했다.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지침을 내리던 마음 깊숙한 곳의 본능이 화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머금어 내고 싶었다. 턱끝이 치켜올라가며 눈꼬리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투명한 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르 미끄러졌다. 남자의 눈 밑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파르는 빈말로라도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는 하지 못할 얼굴로 자극에 겨운 신음을 내뱉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다. 평소 자신에 대해 고찰해 보지 않은 제파르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아는 점은, 자신이 충동적이라는 것.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일에 대해서는 망설임 없이 시행하곤 했다. 이번도 예외는 없었다. 왠지 그 지하실에 가야 할 것 같았고, 왠지 그 옷자락을 쥐고 흔들어 보고 싶었으며, 왠지 이 아랫도리의 사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고 싶었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랬다.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찌걱이는 물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날의 그 이후는, 두 사람 중 누구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맑은 대기를 순식간에 뒤덮는 독성 어린 공기처럼 철저히 무너진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로타네브가 억지로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낸 것일지도 모르고, 또는 아직도 저에 대한 명확한 인지가 서지 않은 제파르가 그날의 기억을 빈칸으로 내버려둔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제파르는 로타네브를 다른 방으로 옮겼다.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의 동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제파르는 고문을 몇 번 더 하더라도 살려 두어야 한다고 우겼다. 정보를 줄 수 있는 '인질'이니까, 죽어 버리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앞으로의 고문을 자신이 전부 담당하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이 기지 어느 깊숙한 곳에 있는 허름한 빈 방에 로타네브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날 이후로 며칠에 한 번씩, 제파르는 생각날 때 그 방을 찾아갔다. 목적은 아마도, 어느 날 갑자기 침입해 온 외부인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 이렇게 하면 정보를 뱉어낼 것이라고, 제파르는 생각했다. 아니, 사실 로타네브에게는 이 방법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짜로, 할 말 더 없나?"
아까부터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정확히는 며칠 전부터. 언젠가 선배들에게 배운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인질이 순순히 입을 열지 않는다면 다양한 방법을 쓰면서 어떻게든 얻어 내라고 배웠지만, 제파르의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며칠 째 그대로였다. 손가락 끝이 자유롭게 로타네브의 신체를 결속하고 모험하고 탐색해 나간다. 로타네브의 신음 소리와 저의 달뜬 숨소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늘 똑같이 물었다. 할 말이 더 없느냐고.
"제파르."
"......"
한 차례의 물음이 더 겹쳐온 끝에는, 평소와 다른 흐름의 대화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숨을 겨우내 진정시킨 로타네브의 목소리가 제파르의 이름을 얌전히 담아 보였다.
"......제파르?"
"듣고 있으니 말해. 이제 할 말이 생각난 건가?"
무언가의 기대감이 제파르의 정신을 슬그머니 자극했다. 원했던 것에 한 발자국 다가가서 그런 거다, 스스로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약간의 간극 끝에 로타네브가 웅얼거리며 이야기했다.
"......줘."
"뭐라고?"
"풀어 줘. 풀어 달라고, 이제......"
"......"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라는 듯, 제파르가 말을 더 잇지 않고 로타네브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는 듯하면서도 로타네브의 진회색 눈은 제파르의 보라색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어지는 말이 없자 로타네브의 입술이 다시금 움직였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해? 더 말할 거 없다니까, 진짜로."
"......"
"풀어 줘, 집에 가고 싶어......"
끝이 침울하게 내려앉는 목소리가 제법 간절하게 들렸다. 제파르는 여전히 말을 잇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로타네브를 바라본 채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전원이 들어온 로봇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다란 담요 한 장을 끌어와 로타네브의 나신 위에 던지듯 덮어 놓고, 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제 바지를 주워 입었다. 말없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던 정적을 로타네브의 목소리가 슬며시 깨뜨렸다.
"풀어줄 거야?"
"......감기나 다 낫고 말해."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제파르는 방을 나섰다.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한 번쯤은 느껴 봤을 법도 한 이 감정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겠다. 이 감정의 이름을, 지금 이 상태의 이름을 알기만 한다면 확실히 쉬워질 것 같은데, 그 한 단계가 걸려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숨을 여러 번 내쉬어도 편안해지지 않는 속이 여전히 신경 쓰였다. 늘 똑같이 걷는 복도를 걸어도 이 답답한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 감기라니. 나 감기 아닌데......"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나간 제파르의 뒤로는 담요 한 장을 슬쩍 말아 쥔 로타네브만이 남았다. 감기? 애초에 감기 같은 건 걸린 적은 거의 없었다. 순간 허전해진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던 로타네브의 머릿속에 며칠 전이 떠올랐다. 그날, 제파르와 처음 만났던 그날의 고문실에서. 마지막 순간이 어땠는지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 다음날의 첫 장면은 밭은 기침을 연속으로 해 대던 자신이었다. 고문이라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더욱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어진 고문에 로타네브는 며칠 동안 앓듯이 지냈다. 그런 와중에도 제파르는 며칠에 한 번 꼴로 찾아와 제게서 정보를 캐낸다는 명목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그거 진짜 감기 아닌데.'
변명해 봤자 소용없는 한 문장을 속으로만 되뇌어 보았다. 그때 걸리지 않은 감기가 이제서야 걸린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조금 전의 뜨거웠던 달빛 밤 때문이었을까, 로타네브의 상기된 양뺨이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 딱 그 정도였다. 그저 그런 하나의 에피소드가 또 늘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특별히 로타네브가 풀려났다거나, 말할 만한 내용이 더 생각난 것은 아니었고. 그 뒤로 제파르는 두어 번 정도 로타네브의 방을 찾아왔다. 그리고 똑같은 전개가 펼쳐졌다. 이젠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옷자락이 의미 없이 떨어지고, 제파르의 손가락이 로타네브를 탐색했으며, 점차 강도가 세어진 끝에 이제 제파르의 배 아래쪽에 있던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선명한 로타네브의 시야는 그때마다 하얗게 세어 버리는 듯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제파르는 제 나름대로의 '정보를 캐내는 방법'을 업그레이드시켜 나갔다.
어떤 날은, 커튼으로 슬쩍 덮어 둔 창살 너머로 무언가가 둔탁하게 깨지는 소리와 터지는 소리, 사람들이 오가며 고성을 지르는 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려 왔다. 늘 고요했던 이곳이기에 별난 일이라고 생각할 무렵 방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 로타네브는 낯선 얼굴을 마주했다. 남자의 치켜 올라간 눈썹 옆에는 검푸른 멍 자국이 있었다.
"제파르는?"
"......허, 미친 놈."
"미친 놈? 내가?"
"너라고 한 적은 없는데. 지금 보니 미친 놈이 아니라 미친 놈들이었군. 나와."
어이가 없다는 듯 숨소리를 낸 모르는 남자가 로타네브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다는 듯이 방문가에 선 채로 고개만 슬쩍 움직여 눈짓을 했다. 로타네브는 거의 얹듯이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나 풀어 주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하여간에, 제파르 그 미친 자식은......"
"제파르? 제파르가 왜?"
"......하아. 쌍으로 미친 게 맞네. 나가, 저쪽으로."
"나가라고?"
"그래, 너도 나도. 인생 종 치기 싫으면."
그리고 남자는 로타네브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꼭 질린다는 듯이 로타네브를 대충 바라보며 말을 던지고는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뒷문을 향해 빠른 걸음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로타네브는 스스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제파르를 지울 수 없었다. 이유가 어땠는지를 떠나서, 처음 보는 남자의 입에서 저와 제파르를 쌍으로 묶어 미친 자라 표현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나도'라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로타네브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기 바빴다.
"조, 조금만 천천히...... 어?"
보폭이 큰 남자를 따라잡으려면 그만큼 로타네브의 발걸음도 빨라져야 한다. 결국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애매한 보법이 계속되었고, 그 끝에서 호흡이 조금씩 가빠 오기 시작했다. 겨우내 뱉어 낸 한 마디는 완성되지 못했다.
"아, 미친."
앞장서 있던 모르는 남자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 방에서 들었던 희미한 고성의 소리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건물은, 안전하지 못하다. 로타네브가 우뚝 멈추어 선 바로 그 자리. 앞장서 있던 남자와 로타네브의 사이에 있던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벽을 타고 둔탁한 파괴음이 들려 왔다. 젠장, 뭐 이딴. 중얼거리던 소리는 이내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되었고, 그 순간 벽이 무너져 내렸다. 아마 외부 어딘가에서부터 하나씩 무너져 내리던 벽이 기어코 여기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로타네브!"
순간, 로타네브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끄는 손이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다급한 듯 들리는 그 목소리는 들어본 듯하면서도 낯설었다. 어느새 제 눈앞에 나타난 초콜릿 색 피부의 키가 큰 남자.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는 오래 전에 생긴 것처럼 무뎌지고 흐려졌지만 그보다 더 아래, 볼 근처에 갓 생긴 듯한 험한 상처가 붉게 새겨져 있었다.
"제파르?"
이미 무언가의 일을 치르고 온 듯한 외양을 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로타네브의 입에서, 그리고 그런 로타네브를 뒷문으로 데리고 가던 모르는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울려퍼졌다. 제파르의 왼손은 로타네브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모르는 남자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스치듯 떠올랐다. 또 그 표정이었다. 쌍으로 미친 놈이군, 하고 중얼거리던 방금 전의 그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로타네브가 아닌 그 너머의 다른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방금 전의 고양된 목소리는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듯 다시금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가 로타네브를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우르릉, 하는 요란한 소리는 이내 방금 전까지 로타네브가 서 있던 쪽으로 벽을 무너뜨렸다. 중얼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던 눈썹이 치켜 올라간 그 남자는 잔해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너진 벽 너머로 서늘한 저녁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뭐 그런 식으로 메가폰에 대고 떠드는 농성 소리 비슷한 것이 어렴풋이 바람결을 타고 전해져 왔다. 아주 잠시 그 너머를 바라보던 제파르는 로타네브의 손목을 붙잡은 채 어딘가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옷깃을 잡힌 채 고문실로 끌려 들어가던 그날처럼, 로타네브는 그저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무너지던 잔해에 스치듯 긁힌 팔에 쓰라린 감각이 아릿하게 다가왔지만, 티를 낼 수조차 없었다.
찬바람이 스치던 어슴푸레한 초저녁은 이제 완전히 어둑해져 있었다. 쇠창살을 넘어 들어오던 푸른 달빛은 이제 은은하게 두 사람을 비추어 내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그 달빛마저 사라졌다. 로타네브의 오른쪽 손목을 말아 쥔 제파르가 빠르게 앞장서며 구석진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무성하게 자란 지 오래되어 관리를 포기한 듯한 풀숲 사이에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달빛은 사라졌다.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은 검은 숲은 하얀 달을 삼켜 버렸다. 바지 주머니에서 조그만 다용도 칼을 꺼내 날을 세운 제파르가 한쪽 손은 여전히 로타네브의 손목을 붙잡은 채 반대쪽 손으로 잔가지를 아무렇게나 베며 길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길 같지 않은 길을 겨우내 걸어가는 와중, 로타네브의 왼쪽 옆에 있는 가지 끝에는 검붉은 것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제파르, 방금 지나온 게 그 뒷문──"
"쉿."
이 상황을 파악해 보고자 슬쩍 말을 꺼낸 로타네브의 목소리는 제파르에 의해 막혔다. 무언가에 강하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반파된 문 비슷한 것을 지나 이 숲에 이르렀으니까. 방금 전 무너진 잔해 뒤로 몸을 숨긴 남자는 로타네브를 뒷문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었다. 모르는 남자가 아니라 제파르가 데려다 주었지만, 뭐 어떻게든 된 걸까. 그럼 그 남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이 조금 들 무렵에는 복잡하던 머릿속을 시원하게 날려 주는 소리가 들렸다.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허공을 찢어 내는 것처럼 울렸다. 곧이어 고함 비슷한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들이 더 들려 왔다. 달빛마저 비치지 않는 검은 숲에 순간 붉은 빛이 슬쩍 내비쳤다. 홀린 듯이 숲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로타네브의 시야에 질 좋은 장작 위로 불타는 새빨간 불꽃 같은 것이 보였다. 불꽃이었다. 찬란하고 화려하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꼭 이 숲까지 집어삼킬 것처럼. 방금 전 제파르에게 이끌려 여기까지 온 걸까, 싶을 정도로 건물과 지금 서 있는 곳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적어도 불길이 여기까지 닿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저기는.
"......"
로타네브는 눈만 돌려 제파르 쪽을 바라보았다. 제파르의 얼굴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감정이라고는 오래 전에 잃어버린 양철 로봇처럼, 그저 파도처럼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불길 사이로 몸을 숨겨 그 잔해마저 깔끔하게 처리되는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의 본거지── 제파르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새 로타네브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은 그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그, 묻거나, 그러진 않을 거니까."
그런 제파르의 눈치를 보듯, 로타네브의 옅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숱이 풍성한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데다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엉망진창이었다. 오른손으로 고무줄을 잡아당겨 풀고는, 머리를 다시 묶기 위해 양쪽 팔을 들어올리던 순간이었다.
"아──!"
로타네브의 입술이 짓깨물듯 다물리며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고무줄을 들고 있던 오른손이 왼쪽 어깻죽지를 붙들고 있었고, 검은 고무줄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왼팔을 붙잡은 오른손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며 미세하게 떨렸다.
"다친 건가?"
"아, 모르겠어. 그냥......"
넘실대는 불꽃에 기어코 집어삼켜지는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의 본거지를 바라보던 제파르의 시선이 로타네브에게로 떨어졌다. 다쳤냐는 물음에 로타네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파르의 손이 곧바로 로타네브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떼어낸 뒤, 주머니에 넣었던 다용도 칼을 다시금 꺼내들었다. 로타네브의 어깨가 다시 한 번 움츠러들었지만 제파르의 칼은 날렵하게, 로타네브의 어깻죽지를 덮은 옷자락을 찢어 냈다. 그 칼을 든 제파르의 손에도 하얀 흉터 자국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의 흉터는 이제 푸르스름한 멍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어──"
"움직이지 마라, 상태를 봐야 아니까."
꼭 옷깃이 찢어지던 것처럼, 혹은 벗겨지던 것처럼. 한순간에 제 맨살이 공기 중에 드러나 버렸다. 푸른 달빛이 이제 아주 조금씩은 은은하게 비추어지는 듯했다. 그 사이에서 제파르는 그 상처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병원으로 가지."
"병원? 갑자기?"
"난 의사가 아니다. 적어도 절단은 실력 있는 의사에게 맡기는 게 좋지 않겠나?"
"절단? 파, 팔 잘라야 해?"
"병원 안 갈거면."
"가, 갈게! 갈게......"
일반적이지 않은 사실을 일반적인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것은 제파르 특유의 말투였다. 사실, 로타네브의 상태는 일반적이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병원에 가지 않는다면 절단하게 될지도 모른다, 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물리적으로 피 튀기는 전장이며 작전 현장에 수없이 발을 들였던 제파르는 로타네브의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염된 철근에 긁힌 상처, 이 식물은 독성이 있는 것이었나?'
겉모습은 으리으리해 보이지만 안쪽은 완전히 부실 공사였다. 정확히는, 보수를 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군대 측에서 보낸 군용 장비가 쏘아올린 묵직한 한 방에 처참하게 무너졌겠지. 겨우내 건물을 지탱하고 있던 철근은 지난 몇십 년간 오염되고 교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둥이 무너지며 생긴 잔해에 로타네브의 팔이 긁혔고, 그 상태로 지혈도 하지 않은 채 꽤 많은 피를 흘렸다. 더군다나 검은 숲을 헤치고 오면서, 정체 모를 식물들에까지 쓸린 로타네브의 팔이 온전할 리 없었다. 그 어떤 병원에 가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의사를 만나도, 로타네브의 팔을 절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제파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가기 전에, 머리 좀 묶고......"
머리를 다시 묶으려고 팔을 들다 고통을 자각하게 된 로타네브는 다시금 원래의 목적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한 갈래로 높게 올려 묶은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채 밤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길고 약간 구부러진 로타네브의 머리카락이 어깨와 등을 따라 여기저기 늘어졌다. 방금 전 땅에 떨어뜨린 고무줄을 찾느라 쭈그리고 앉아 오른손을 바닥에 대고 더듬거리는 로타네브를 잠시 바라본 제파르는 곧장 그 옆에 자세를 낮추더니 고무줄을 집어 내 그 손가락 사이에 걸어 주었다. 이전부터, 제파르는 그런 작은 부분을 묘하게 잘 캐치해냈다. 서류에 잘못 적힌 이름 한 글자도, 어두운 바닥에 떨어진 검은 고무줄도,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어떤 CCTV도.
로타네브의 한쪽 손이 머리카락을 모아 쥐어 내기 시작했다. 제 손가락에 걸려 온 고무줄은 양쪽 입술로 지그시 물어 내고는, 올라가지 않는 왼팔을 내버려둔 채 오른팔로만 머리를 묶으려 하고 있었다. 제파르의 시선은 그 불안정해 보이는 몸짓을 향했다. 머리카락이 한 갈래로 높게 들어올려지자 로타네브의 뒷목이 하얗게 드러났다. 달이 떠 있다. 이 검은 숲에도 이제 청백색 달빛이 비쳐 들어온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 이 근처 어딘가에 작은 호수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경치를 완상할 여유 따위는 없지만, 로타네브의 머리 묶기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양손으로 잡아도 모자랄 만큼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쥐고 나니 고무줄을 쥘 손이 없었다. 입술 끝에 걸려 있는 고무줄이 처량하게 매달려 있었다. 결국 로타네브의 입술 사이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고무줄을 물고 있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제파르, 이거, 좀──"
"뱉고 말할 생각은 없는 건가?"
아슬아슬하게 고무줄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입을 벌리며 말하던 로타네브의 입술 사이에서 고무줄을 빼앗듯 가져와 그의 손목에 걸며 제파르가 말을 끊었다.
"아, 뱉고...... 음, 그러니까."
"듣고 있으니까 말해."
"이대로, 좀 잡고 있어 줘. 잠깐이면 돼."
그렇게 말하고는 로타네브가 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올려 잡은 채 제파르를 등지고 섰다. 제파르의 시야에 하얀 목덜미와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목덜미에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말없이 제 앞에 등을 보이고 서는 로타네브를, 제파르로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저를 잡아다가 고문한 존재에게, 이렇게 쉽게 빈틈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나뭇가지를 베고 옷을 찢던 그 칼을 지금 꺼내면 어쩔 셈이지? 그런 의문 사이에서도 로타네브는 기다리는 듯 제 머리카락 한 줌을 들고 서 있었다. 결국 제파르는 그 머리카락을 받아들어 잡을 수밖에 없었다.
"......"
"......"
제파르가 로타네브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동안, 로타네브의 오른손은 제파르의 손목에 걸려 있던 제 고무줄을 가져와 검은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올려 묶기 시작했다. 그런 로타네브의 뒤에 가까이 붙어선 채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제파르의 시선은 다시 불타는 건물 쪽으로 향해 있었다. 마음 급한 새벽별이 떠오르기 시작한 걸까,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은 공기 아래 불길도 조금 차분해진 것 같았다. 다 태우고 난 뒤 더 이상 집어삼킬 것이 없는 화마는 천천히 퇴장 신호를 알리고 있는 듯했다. 제파르의 보랏빛 눈에 붉은색이 어른거렸다.
"잠깐, 뭐야, 저거?"
"왜, 또 쥐새끼야?"
오래된 건물 한켠에는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는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의 대원 세 명이 그 방에 있었다. 정확히는 한 명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은 망원경을 번갈아 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든 것은 수다를 떨던 두 명이 무언가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 우주가 탄생할 때부터였을까?
"......야, 빨리 보고 넣어."
"넘버 나인 뜨는 거 아니야?"
서로를 바라보며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파르의 귀에 꽂혀 있던 통신 장치가 정신 사납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사인에 반응하는 것은 거의 본능이었다. 제파르가 이 소대에 들어오고 나서 가장 먼저 받은 훈련이 이것이었다. 정신 사납게 울리는 신호가 채 두 번이 울리기 전 제파르의 발걸음은 어느새 작전실을 향하고 있었다.
코드 넘버 나인──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 대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름이었다. 그냥, 한 마디로 비상 사태. 당장 오늘내일 할지도 모를 만큼 비상 사태. 작전실로 모였지만 유의미한 작전을 세우고 있을 여유조차 없는 비상 사태. 여기 모인 것은 그냥,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소대원들의 얼굴을 잠깐 눈에 담아 보고, 각자 흩어져 제 갈 길 찾아 나서야 하는 정도의 의미만을 지닐지도 모른다.
"숲으로 이어지는 뒷문으로는 군용 차량이 들어오지 못할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마 상관이겠지.
"현 시간부로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는 해체한다. 훗날을 기약하며, 우리들의 사명을 잊지 마라."
고문자의 별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음성 언어 한 마디에 스러졌다. 우리들의 사명이 뭐였지? 별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형식적으로 있어 보이는 말이 끝난 뒤에는 문 가까이 서 있던 소대원 몇몇이 겁에 질려 뛰쳐나가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가야 했다. 지금은 비상 상황. 반정부 조직인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이제는 그냥 전천후 테러범 처치곤란 말썽꾸러기 암세포 집단─를 처리할 틈을 보던 정부가 기어코 군대를 보낸 모양이었다. 뒤이어 제파르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작전실에서 뛰쳐나간 후, 제파르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아주 의외의 것이었다.
"인질은?"
"인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때 지하실에서 잡은 인질. 두고 가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뭐가 안 중요해?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
눈썹이 치켜 올라간 이 소대원은 제파르의 부하 같은 존재였다. 딱히 직속 상관 같은 건 아니었지만, 그냥 저보다 조금 더 늦게 들어와서 아래 위치가 된 느낌이었다. 그 소대원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지금까지 말 안 하고 있었던 건데 말입니다."
"......"
"뭐 하십니까?"
꼭 본질을 꿰뚫는 듯한 질문이었다. 뭘 하고 있냐고?
"뭘 하긴. 앞으로의 일을 생각──"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크게 흘린 남자가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코드 넘버 나인 떴겠다, 이제 미련도 없어, 뒷말할 필요도 없겠지."
"......"
더 이상 경어를 쓸 의지조차 없다는 듯이 남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젠 대놓고 한심하다는 눈빛을 직접적으로 쏘아 대고 있었다. 팔짱을 낀 남자의 입에서 날카로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정부 끄나풀이야?"
"정부?"
그 말에는 제파르도 반박의 기를 들었다. 아니, 사실 반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제파르는 정말로, 정부 소속도 그의 끄나풀이도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그런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니긴 뭘 아니야. 그 인질이라는 놈 잡을 때부터 이상했어."
"......"
"죽이지도 못하게 해, 뭐 어떻게 정보를 캐내고 있는지도 공유 안 해, 그 와중에 둘만 멀쩡하지."
제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어 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제파르는 가만히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제파르가 정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었다. 잠깐, 그럼 왜 그랬던 거지?
"거기다 인질을 위해서 방까지 내 줘. 뭐 하자는 건데?"
"......"
"겉으로는 충실한 소대원인 척, 속으로는 아니었던 거잖아. 그 정부 해커 자식이랑 한통속으로 짜고 쳐서, 저 군대도 둘이 연락해서 부른 거겠지. 그래서, 얼마 받았냐?"
"받다니, 뭘?"
"이 새끼 봐, 끝까지 모른 척하네? 돈 말이야, 돈. 도대체 얼마나 받아먹었길래 아르크튜러스를 배신해?"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아르크튜러스를 배신한 적 없어. 그리고 그 남자는 정부 소속이 아니라──"
제파르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둔탁한 소리가 작전실을 울렸다.
"......아."
눈썹이 치켜 올라간 소대원의 주먹이 꾹 말린 채 그의 허벅지 근처에 있었다. 어딘가 불편한 듯 혀로 입 안을 쓸던 제파르의 혀끝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이내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 내고는 그 남자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형형한 보랏빛 눈이 빛났다.
"내가 우습게 보이나?"
"소대도 해체됐지, 당신도 더 이상 내 상관이 아니──"
이번에는 남자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주먹을 말아 쥐고 그 사나운 눈썹 끝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우당탕, 하고 작전실의 테이블까지 넘어뜨리며 화려하게 뒤로 누운 남자의 옷깃을 잡아 세웠다. 꼭 멱살을 잡듯 옷을 들어 올리자 뒷목이 눌린 남자가 캑캑대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까이 붙여 내는 제파르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질 데리고 후문으로 나가. 인질이 무사하지 못하면, 네 인생도 종 치는 거다."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남자를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작전실 밖으로 나왔다. 미친 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오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예상 외로 로타네브를 데리고 후문 근처까지 왔다. 하지만 얼타고 있는 것은 여전했다. 중요한 게 뭔지 잘 모르는 듯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으면 피하는 게 상식적이지 않나? 로타네브를 앞에 세워 놓고 무언가 말하는 듯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럴 시간에 피하겠, 아 이런, 무너졌군. 잔해 너머로 사라지는 남자를 보며 머릿속에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로타네브의 이름을 외치며 그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문득 조금, 아주 조금은 아쉬워졌다. 저 남자에게도 로타네브에 대해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설명도 변명도 해명도 그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잔해 너머로 사라졌을 그 남자를 잠깐 생각했다.
"이쪽으로."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곧이어 제파르의 머릿속에는 제가 손목을 붙들고 있는 로타네브와 후문, 그리고 파괴될 위기에 처한 아르크튜러스 특수 소대만이 자리하게 되었다.
다시 현재, 제파르의 시선은 지금 재가 된 건물을 향해 있다. 더 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화마는, 커튼콜도 없이 장렬한 퇴장 인사를 남긴 상태였다. 적색 거성, 어쩌면 그리 될 운명이었다는 듯이. 아르크튜러스는 새빨갛게 타오른 뒤 다시 모든 것의 태초로 돌아가고 있었다.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그 순간. 아르크튜러스의 반짝이던 영광과 함께 제파르는 돌아갈 곳을 잃었다.
"......제파르."
문득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를 계속 그렇게 잡고 있으면."
제가 말아 쥐고 있던 로타네브의 머리카락이 어느새 검은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내며 그대로 손을 놓았다. 너무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탓인지, 로타네브의 머리카락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묶기 이전보다 더 사방으로 뻗친 것 같았다.
"아, 이게 아닌데......"
결국 로타네브는 오른손을 위로 올려 다시금 머리를 풀어 냈다. 머리를 다시 정리하려는 듯 손가락을 빗처럼 세워 머리카락을 쓸어 내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아마 잠시 뒤면, 아까처럼 도와 달라며 제게 등을 보이고 서겠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등과 허리를 감싸며 내려앉는 모습이 꼭 검은 베일을 뒤집어쓴 사람 같다고, 제파르는 은연 중에 생각했었다.
어쩌면 거기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곳은, 없어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저를 끈질기게 괴롭혀 오던 이름 모를 감정의 이름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저 건물을 태우고 남은 아주 미약한 불씨처럼 희미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커다랗게 번져 올까, 이 감각의 존재에 대해서 더 알 수 있을까. 조금만 더, 네 곁에 있다 보면......
......검은 베일이, 제법 잘 어울리는군.
完.
후기
안녕하세요? 비공식 제로 팬클럽 명예 총무 블루입니다. 회장은 너무 나대는 것 같아서 총무 정도로 하려구요... 자컾 애프터를 하다가 8페이지짜리 칸만화 회지를 그려 오는 오너들 실존사건. 여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만 제로 뽕이 차올라서 급발진 조각글을 써 보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시작한 조각글이 벌써 세 편째입니다. 제 자컾으로도 이렇게 길게 안 써 봤는데 제로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제로는 장르라니까.
만화와 썰에서는 수위 묘사도 기깔나게 들어가 있었는데, 제 묘사 실력이 비루했던 관계로 로타네브 겉핥기만 시켜 버렸지 뭐예요. 이해해 주세요, 전 수위는 아무래도 좀 그런가 봐요 ㅎㅎ 그렇지만 쓰는 거 너무 재미있었다. 원래 갓썰은 이 닦다가, 머리 감다가 생각나는 것처럼 진짜 문득 불쑥불쑥 생각나는 영감의 연속으로 무언가의 장편이 하나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제목인 Code Breakers (코드 브레이커스) 는 말 그대로 코드─정해진 것─를 부수는 자들을 의미해요. 제가 본문에서 종종 언급하던 게 '답지 않게'라는 말이었는데, 적진에 침입하면서도 '답지 않게' 자신감 있어 보였던 로타네브라거나 늘 FM의 규정을 따르던 와중에 새로운 방식의 고문을 시도하는 '답지 않은' 제파르의 모습 등, 서로의 일상 속에 침입한 비일상의 존재로부터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거기서 서사가 발전하는 그런 빌드업을 쌓아 보고 싶었는데,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지는 미지수네요. 그래서 제목도 복수형입니다. 브레이커스는 제파르와 로타네브, 두 명이었으니까.
제로 성사 안 됐으면 얘네 지금쯤 뭐 하고 있었을까. 잘 생각도 되지 않지만, 그냥 지금의 저는 제로가 참 좋네요. 남의 자컾인데도 참 재미있게 망상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짜 탐라에 쏟아지는 뉴짤과 뉴썰, 갓연성들이 저를 늘 행복하게 만들어요 :) 제로 사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로. 비록 저의 비루한 캐해석과 어딘가 조금 이상한 표현력으로 마음대로 써 버린 글이지만, 좋아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로는 장르다.

하나만 더. 글 세 편 모두 합쳐서 몇 자나 나올지 궁금해서 글자수세기 해 봤습니다. 이거 6편까지 썼으면 남의 자컾 연성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들 뻔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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